Dasom

 

작성자 moam(admin) 시간 2017-12-04 08:51:06 조회수 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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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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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용산고등학교, 미국 콜럼비아에서 미술사학과 학사졸업. 시카고 대학원과정에서 미술사·이론 & 예술비평과 예술경영·정책학을 공부, 졸업한 아직 많이 부족한 인문학도人文學徒.



[다솜 하나] 동경 그리고 불안함


混沌 (CHAOS)and 選択(CHOICES)


われわれがている絶対的真実だとえるか?だったら、動物えた世界はどうか?たしかに、人間とはなるとわれます。また、われわれのこっているが、えない現状などはどう説明できますか?そのさまざまな錯視現状などまでえると、われわれは、幻影(Illusion)混沌 (Chaos)んでいるとえます。

はこの世界には絶対的明確なのは存在できないし、また、存在しないといます。各個人はこの混沌のなかですべての状況客観的調(中庸中庸)毎瞬間最善選択しに努力しているだけだいますそれから、われわれの人生毎瞬間このような選択をするべきの選択連続性いてあるとえます。また、このような選択われわれにかう視線だちでもこる相互的選択連続えるし、このような選択芸術世界作家観客でもじだといます。 

- 李 庸 銖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이 부분은 『인정향투 2 - 선비의 향기를 맡다』의 프롤로그(Prologue) 부분과 겹치게 되었습니다.  

[참조] 이용수, 『인정향투 2 - 선비의 향기를 맡다』, (Seoul, Bookla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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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Norwegian,(1863-1944), The Girl by the Window, 1893, Oil on canvas,

 96.5 x 65.4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조금은 엉뚱한 인문학적 상상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제가 어릴 적, 아마도 국민학교(초등학교) 1․2학년 쯤, 저 스스로에게 해보았던 질문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더 이른 시기에 품었었던 의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잊고 지냈었지만 한번쯤 누구나 가졌었던 생각일 것입니다. 조금은 우스운 질문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신에게 던지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현대사회라는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지키며 바른 방향을 제시하여 줄 최선의 방향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글의 첫머리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을까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인류의 기원’을 밝혀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우리 부모님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났고 우리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 또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은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의 정신과 육체를 받아 나셨으니 까요. 이렇게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 혹은 ‘우리’를 증명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결국 인류의 기원이라는 난제에 귀결되게 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이자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Descartes, Rene; 1596.3.31~1650.2.11)는 그의 철학적 방법 ‘방법적 회의(懷疑)’를 통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의심하였지만, 지금 의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유명한 한마디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제 생각에 데카르트의 이 한마디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의 실패 내지는 포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인류의 기원을 명확히 밝힐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사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명확한 것은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장면들을 절대적인 사실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다른 생물들, 우리가 키우고 있는 강아지, 고양이, 물고기, 그리고 각 곤충류 등등, 의 눈에 비춰진 세상은 어떨까요? 분명 그들의 눈에 보인 세상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또 우리 눈앞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상들, 각종 미세먼지와 균들 또 이들 간의 상호작용 등등, 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혹은 인식하지 못하는 각종 착시현상들, 내안의 수많은 ‘나’ 중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등등, 어쩌면 지금 우리는 모든 환영(Illusion)과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혼돈(Chaos)' 속에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은 이 혼돈 속에서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중용中庸의 도道, 중용中庸의 미美)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며 살고 있다 할 수 있고 각 개인이 최선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가치관, 생각은 인문학적 학습을 통하여 형성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술세계로 돌아와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모든 예술작품과 그 아름다움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내 곧 엉뚱한 생각과 의문이 듭니다. “과연 그럴까?” 학문 분야로서의 ‘수학’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1+1=2”라는 수식이 아마도 수학분야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수식 중 하나라 생각됩니다. “물 한 방울 더하기 물 한 방울이 물 두 방울일까요?” 또 “공기 한 줌 더하기 공기 한 줌은 공기 두 줌이 될까요?” 우리의 감정 - 기쁨, 화남, 사랑, 즐거움, 슬픔, 증오, 욕심 등 - 을 수치화 할 수 있을까요? 저뿐 아니라 이전부터 많은 분들이 이미 생각했었고 언급했었던 의문들이라 생각됩니다. 제 생각에 숫자와 그를 사용하는 ‘수학’ 역시 우리의 상상(생각) 속에서 만들어졌고 우리 생활의 편의를 위하여 우리 상호간에 약속된 것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발명왕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역시 위 수식에 의문을 품었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조금은 엉뚱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인문학적 질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며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인문학人文學’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너무 방대하여 간단히 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질문에 대한 절대적 진리나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근본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그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문학(人文學)은 인간이 처해진 조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에서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 구별되는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또는 사변적인 방법을 넓게 사용한다. 인문학의 분야로는 철학, 문학, 언어학, 여성학, 예술, 음악, 역사학, 고고학, 종교학 등이 있다.” 
- 위키백과사전

이 내용은 “인문학이란 철학, 문학, 언어, 예술, 역사, 종교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등으로 보다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정의가 모호합니다. 한자 자체로 그 의미를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인人’ 인간자체 혹은 인간에 관한, ‘문文’ 글에 관한 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문학의 영문표기 ‘Humanities’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의 이해로 인문학은 “인간, 즉 우리자신에 관한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인간(인류)의 기원, 인간의 본성 등을 연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류가 살아온 흔적, 남긴 글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근간을 세우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큰 질문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인문학의 근간을 이루며, 철학을 근본으로 한 인문학적 전통은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철학 위에 서있으며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잠정적인 철학자입니다.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 교육시스템의 마지막 학위가 철학박사학위(Philosophy Doctor)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인문학은 왜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인문학의 필요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현대사회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게 된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인문학의 중요성이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멀어지고 현 시점에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만이 원인은 아닐 겁니다. 현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현재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현 사회구성원들과의 소통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저를 포함한 현 인문학자들의 자기성찰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근대화 이래로 점점 물질적 가치와 이로움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도덕성, 윤리성 등 자신의 근간을 세우고 성찰하는 인문학적 전통의 귀중함을 잃어왔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인문학 자체로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가르치는 일’ 외에 물질적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함이 인문학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꼭 필요하다 생각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한 국가의 구성원(국민, 학생 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재화, 이윤추구가 용이한 학문분야(경제, 경영, 법학, 의학, 과학 등)로 몰리게 되는 불균형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인문학에 기본을 둔 올바른 윤리적 가치판단 능력 등을 퇴색하게 만들었으며, 불법적으로 혹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오로지 물질적 이윤추구만을 그 목적으로 하게 되고 이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과 문제점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현실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내외신 언론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현 금융, 경제위기는 금융계 종사자들의 도덕성, 윤리성 결여와 이에 따른 금융의 본질적 역할을 망각하고 이윤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려 했던 데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한 개개인의 도덕성, 윤리성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경제 분야 뿐 아니라 예술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성찰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는 인문학은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각종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등의 역할을 하여 보다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사랑의 시작’을 위한 준비가 갖춰진 것 같습니다. 저와의 사랑을 시작해 보시겠습니까?

 

by Paul Lee

 

https://www.youtube.com/watch?v=9AU9KhMMP20

 

https://www.youtube.com/watch?v=0YpMmHcOP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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