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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oam(admin) 시간 2017-12-06 23:06:07 조회수 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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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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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생, 용산고등학교, 미국 콜럼비아에서 미술사학과 학사졸업. 시카고 대학원과정에서 미술사·이론 & 예술비평과 예술경영·정책학을 공부, 졸업한 아직 많이 부족한 인문학도人文學徒.

 

 

 

1. 비나이다 비나이다​_다솜의 시작 웅녀설화​(2)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조에 전하는 이 '웅녀설화'가 우리나라 최초 사랑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기록'이라 말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다. 물론 이 기록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와 사람이 된 '웅녀'와의 교감을 보여주는 이야기임을 고려하더라도, 기원하여 사람의 몸을 얻고 또 잉태를 간절히 원하여 매일 단수 아래에서 주원하는 '웅녀'를 어엿비 여겨(가엽게 여긴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정황상) 환웅이 인간으로 잠시 변하여 감응하여 우리의 시조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당시 '남성 우월주의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당시 곰 한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해달라 기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 먹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100일 동안 잘 지킨)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고로 매일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주원했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여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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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4. 우허량 여신묘에서 출토된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는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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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요하지역 적봉에서 찿은 암각화 모습

 

이상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웅녀설화(단군신화)'의 전문이다.(원문은 윗부분 참조.) 내용 자체는 길지 않고 간략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이 이야기의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증사학적 입장에서 웅녀설화(단군신화)  에서의 사실성은 인정하되 고조선의 시기와 강역은 기원전 10~7세기와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 다른 견해로 고조선의 시기를 삼국유사에 나타난 시기와 비슷하게 기원전 2400년 경이나 그 이상으로 편년하고 강역을 요하유역 일대로 보며, 이 지역의 홍산문화를 우리 한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라 할 수있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간략히 언급했지만, 이 사안은 실로 굉장히 방대하고 민감한 부분이어서 비전공자인 필자가 이 부분을 자세히 기술하고 평가하기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하기에 상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주목해야할 사실은 최근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성과 등으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가 500~1000년 앞당겨 졌다는 사실과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는 점, 그리고 불과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고조선실'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웅녀설화(단군이야기)에 관하여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송호정은 개정 교과서에 대해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우리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점은 역사학계를 포함한 모든 우리 학계에서 보다 자유로운 학술 연구풍토가 고착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점에서 단국대학교 윤내현이 2003년 펴낸 그의 저서 『우리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 (서울: 지식산업사, 2003) 의 후기에 실은 '홀로 서기, 그러나 외롭지 않다'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각한다. 이 글의 전문을 이 글의 마지막에 싣는다. 일독하여 보기 바란다.]

 

이제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시 단군영정으로 눈길을 돌리자.

 

정부공인 단군영정이 둘이라고?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나라 공인 단군영정은 대종교 소장 춘초 지성채 작 영정(도 2 (좌))과 홍석창 작 현정회 봉안 영정(도 2 (우))이다. 그렇다면 백련 지운영이 신라시대 화가 솔거가 그렸다 전해지는 단군 초상을 모사했다 전해지는 '부여 천진전 단군화상(도 1)'과 이 그림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먼저 솔거가 단군영정을 그렸다는 기록을 찾아보자. 잘 알고있듯 솔거는 화원으로서 유일하게 정사 열전에 실린 인물이다.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史記卷第四十八 열전 제 8 

<率居 솔거>"><率居 솔거>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 ,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烏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찌기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벽화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神畵라고 말한다.

 

대종교총본사大倧敎總本司 편編, 『대종교중광육십년사大倧敎重光六十年史』, (서울:대종교총본사, 1971)와 『대종교요감大倧敎要鑑』, (서울: 대종교출판사, 1993)을 살펴보면, 솔거( 率居 , ?~? )가 단군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저자가 불분명한 『동사유고東事類考』에 전한다 씌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솔거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아주 잘 그렸는데,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시골이라 그를 가르쳐 줄 스승이 없어 날마다 하늘에 계신 신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꿈속에서 단군을 만나 신기한 붓 한 자루를 받았는데, 이후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솔거는 자신을 도와준 단군이 너무나 고마워서, 꿈속에서 본 단군의 모습을 1천 점이 넘게 그렸다고 한다. 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었다는 단군천진을 기리는 글에 의하면 "영외 집집에는 한배검(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 천진을 모셨는데, 그 무렵 거의 반은 솔거의 작품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3 중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은 이규보를 생각하면 이러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나 이외의 기록을 살필 수 없어 아쉽다.  

 

이 『동사유고』의 기록과 이규보가 지었다는 기록을 신뢰한다는 전제하에, 이 전하는 단군천진(초상, 영정)들의 관계를 살펴보자. 

 

『대종교요감大倧敎要鑑』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화가 솔거가 단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그 그림들이 당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곳에 전해져 내려왔는데 조선 말이 되면서 이 솔거의 그림들이 거의 없어졌다 한다. 그러던 중 1910?년 대종교를 창건한 나철에게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솔거의 단군 그림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며 단군 그림 한 장을 건넸다는 것이다.(사실 이 일화에 관한 것도 정확치 않다. 위키백과사전 '삼일신고' 부분을 살펴보면, 1906년 나철이 서대문역 부근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에게서 얻었다 전해지고, 다른 곳에서는 1910년 전에 일본에서 얻었다고도 전해지며, 또 다른 곳에서는 1910년 영정을 얻었다 전해져 혼란스럽다.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나철은 이 그림을 백련 지운영 화백에게 모사케 하여 그해에 이 그림을 단군천진(영정)으로 봉안했다고 전한다. 이후 한일합병이 되어 대종교 지도자들이 대개 만주 등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때 이 그림을 가져갈 수 없어 당시 대종교 국내 본부 격이던 남도본사의 책임자 강우가 남몰래 자신의 부여 본가 다락방에 숨겨놓았다 전해진다. 이 그림이 그의 아들 강석기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또 그의 손자 강현기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 그림을 전하여 받은 강현기가 이 영정을 국립부여박물관에 기탁하여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이 지운영 작 단군영정이 대종교 단군천진으로 계속 봉안되지 않고 바뀌게 된 것일까? 8·15해방 후 1946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인 유세복 등이 환국해 이 단군그림을 찾아 살펴보니 변색된 부분이 있어 지운영 화백의 아들인 춘초 지성채 화백에게 새롭게 모사케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이 모사품이 현재 대종교 측에서 보관하고 전해지고 있는 단군그림(그림 2 (좌))이다. 그 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가 1949년에 국회의 동의를 받아 이 영정을 대한민국 국조표준본으로 공인했다.

 

지운영 작으로 전해지는 단군영정과 지성채 작 단군초상, 두 그림을 살펴보면 화풍이나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점이 전 지운영 작 단군영정을 지성채가 모사하였다는 일화에 사실성을 더해준다. 다만 후에 지성채에 의하여 모사된 영정은 단군의 머리 뒤에 후광(halo) 표현을 더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더하였다. 이 점을 제외하면, 부친 지운영의 단군영정을 충실히 모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품격은 부친의 것에 조금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종합하면, 신라 솔거의 단군 그림이 1910?년 지백련 화백에 의해 모사됐고 해방 직후 그 아들인 지성채 화백에 의해 다시 모사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러한 전해지는 내용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이들이기 전에 이러한 내용들이 전하는 사료들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 공인 단군영정 외에 1977년 홍석창에 의해 그려지고 이듬해 공인을 받은 다른 하나의 단군영정이 생긴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지성채에 의하여 그려진 영정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정부의 공식적인 행사에 어울리지 않고  일반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인 색채를 줄이고 보다 친근한 모습의 현정회 표준영정을 공인했다는 것이다.  일견 수긍이 간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앞서 제안하신 분들의 의견처럼, 영정의 단일화 작업을 함께 모색함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이상으로 미약하나마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단군영정과 영정들이 전해지게 된 이야기들, 그리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전하는 고조선과 웅녀, 단군에 관한 내용과 그 의미를 알아보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웅녀설화(단군신화) 부분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자. 이 설화 내용의 부분 중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그 부분을 살펴보자.

 

"웅녀(熊女)는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고로 매일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주원했다." 

 

이 내용 중 '주원呪願'이란 단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보통 '주원呪願'은 '주문을 외우며 기원한다'는 의미인데, 이 주원이란 단어와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받아 먹은 '쑥'과 '마늘'이 '주술성'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 불가(불교)에서도 '주원'이란 단어를 쓴다고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승려이기에 이 단어를 쓴 것인지 옛 문헌 『고기』의 기록을 인용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주원'이란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단군왕검이 세웠다는 '(고)조선'에 관한 그 시기와 위치.강역설정에 관한 이견문제, 물론 이와 같은 물리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경천애인敬天愛人'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은 아닐까? 문득 박은식(朴殷植 : 1859~1925)이 그의 저서 『한국통사韓國痛史』서언 부분에서 주창한 "나라는 형(形體)이고 역사는 신(精神)이다."라고 한 문장이 떠오른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며 신단수 아래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읊조리며 간절하게 아이를 잉태하게 해달라 정성스레 기원하는 우리의 시조모 '웅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해 진다. 

 

by Paul Lee

 

https://www.youtube.com/watch?v=MrMar1ZoBvo

 

https://www.youtube.com/watch?v=50VWOBi0V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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