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om

 

작성자 moam(admin) 시간 2017-12-16 18:25:34 조회수 1418
네이버
첨부파일 :

[저자] 이용수  

 moam01_1_6.jpg

서울 출생, 용산고등학교, 미국 콜럼비아에서 미술사학과 학사졸업. 시카고 대학원과정에서 미술사·이론 & 예술비평과 예술경영·정책학을 공부, 졸업한 아직 많이 부족한 인문학도人文學徒.

 


[다솜 넷]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공후인箜篌引


公無渡河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님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그 님을 어이할꼬.

(이용수 번역)

 

7_1.jpg
▲ 와공후 (출처: 다음 백과사전)

 

8_1.jpg

▲ 수공후 (출처: 다음 백과사전)

 

9.jpg
▲ 소공후 (출처: 다음 백과사전)

 

[공후​] 고대 동양의 현악기. 서양의 하프와 비슷하며, 틀 모양에 따라 와공후(:13현) ·수공후(:21현) ·대공후(:23현) ·소공후(:13현) 등으로 구분된다. 공후는 본디 서역계의 악기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는데, 언제 어떠한 경로로 전래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이 악기들은 연주법을 잊어버린 채 악기의 모습만이 국립국악원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문헌상의 기록도 거의 없어 그 흔적을 찾기는 힘드나, 중국 《수서()》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의 일부에서 공후가 쓰였다 한다. 현재 보관되어 있는 것은 1937년 당시 아악사장()으로 있던 함화진()이 베이징[]에서 사들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후 [箜篌] (두산백과)

 

한 남자가 새벽 물가에서 배를 손질하고 있다. 잠시 후 갑자기 머리가 흰 노인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술병을 끼고 비틀비틀 강물 속으로 들어간다. 그 뒤에는 여인이 공후를 끌고 좇으면서 노인을 애타게 부르며 말리지만 노인은 이윽고 물에 들어가고 만다. 그녀의 애절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은 깊은 물에 쓸려 죽는다. 이에 여인은 끌고 온 공후를 안아 잡고 '공무도하'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듣고 있던 물가의 남자는 여인의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여인은 공후를 타며 비통함의 노래를 마친 후 노인을 좇아 물에 들어가 노인을 뒤따른다.


위 고사와 그 내용은 우리의 대표적인 고대시가와 그 설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공후인箜篌引' 혹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다. 공무도하가의 내용이 전하는 최초의 기록은 진晋 최표崔豹가 엮은 '고금주古今注'와 중국 후한 後漢의 채옹蔡邕 또는 진의 공연孔衍이 엮은 것으로 전하는 '금조琴操'에 전하는데 그 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님하! 물울 건너지 마오​


崔豹 『古今注

箜篌引 朝鮮津卒 霍里子高妻麗玉所作也 高晨起 刺船而濯 有一白首狂夫 被髮提壺 亂河流而渡 其妻隨呼止之 不及 遂墮河水死 於是 援箜篌而鼓之 作公無渡河之曲 聲甚悽愴 曲終 自投河而死 霍里子高​ 還以其聲 語妻麗玉 玉傷之 乃引箜篌 而寫其聲 聞者莫不墮淚掩泣焉 麗玉以其曲 傳隣女麗容 名之曰 箜篌引

古今注​ 券三 箜篌引

 

공후인은 ​조선 진졸津卒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배를 끌어 내어 닦고 있었다. 머리가 흰 한 미친 남자가 있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채 술병을 들고 어지럽게 흐르는 강물을 건너려고 했다. 그 아내가 따라가며 그를 멈추게 하려 했지만 [그에게] 미치지(닿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 그러자 [아내가] 공후를 가져다가 타면서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노래를 끝내고 아내도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서 죽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소리를 그처 여옥에게 들려 주었더니, 여옥이 슬퍼하면서 이내 공후를 끌어내다가 그 소리를 옮기니,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옥은 그 노래를 이웃집 여자인 여용에게 전하면서 그 노래를 '공후인'이라 하였다.

(이용수 번역)

 

위 글로 미루어 이 당시 '공후' 악기가 상당히 대중화 된 것임을 유추 할 수 있고, 백수광부 처의 한맺힌 노래를 한 번 듣고 기억하여 처 여옥에게 전한 곽리자고, 여옥, 여용 등 당시 인물들의 음악에 관한 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생각한다. 

 

蔡邕 琴操​』 

箜篌引 者 朝鮮津卒 霍里子高所作也 子高 晨刺船而濯 有一狂夫 被髮提壺 涉河而渡 其妻追止之 不及 墮河而死 乃號天歔欷 鼓箜篌而歌曰 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死 當奈公何 曲終 自投河而死 子高聞而悲之 乃援琴而鼓之 作箜篌引 以象其聲 所謂公無渡河曲也

琴操​』 箜篌引​ 

 

공후인은 조선진졸 곽리자고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배를 살피며 청소하는데 한 미친 사내가 있어 머리를 산발하고 술병을 끌며 물을 건너고 그 처가 따르며 그치려 하였으나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윽고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처가] 하늘에 울부짖으며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불렀는데,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그 님을 어이할꼬. 곡을 마치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들으니 그 노래가 매우 슬퍼 이에 거문고로 그 노래를 타며 공후인을 지었는데, 그 소리를 모방한 것이 소위 '공무도하곡'이다.

(이용수 번역)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전하는 '공무도하가'에 관한 기록들은 어떠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중국의 문헌을 옮겨 적은 것으로 조선 초·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권문해權文海 (1534 ~ 1591)​가 『대동운부군옥』에서 최표의 『고금주』를 인용한 이후, 박지원의 『열하일기』,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오세창의 『대동시선, 차천로의 『오산설립, 『청구시초 등에 전하여 지고 있는데, 모두 최표의 『고금주를 인용하여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없으나, 대표적으로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 '공후인'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 22권, 악지樂志 악가樂歌와 악무樂舞

 

[악지樂志​]

​ 공후인은 조선 진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배를 끌어내어 닦고 있었다. 머리가 흰 한 미친 남자가 있어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채 술병을 들고 어지럽게 흐르는 강물을 건너려고 했다. 그 아내가 따라가며 그를 멈추게 하려 했지만 [그에게] 미치지(닿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 그러자 [아내가] 공후를 가져다가 타면서'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노래를 끝내고 아내도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서 죽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소리를 그 처 여옥에게 들려 주었더니, 여옥이 슬퍼하면서 이내 공후를 끌어내다가그 소리를 옮기니,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옥은 그 노래를 이웃집 여자인 여용에게 전하면서 그 노래를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古今注고금주』  


살펴보건데, 조선은 바로 한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다. 여옥麗玉​이 지은 공후인箜篌引​은 『고시기』에 그 사詞가 실려 있는데, [사는 (해동역사) 예문지에 나온다] 역시 '공무도하公無渡河​'라고 하였다. 또 『금조琴操』 「인引9」에 공후인이 있는데 모두 여옥에게서 나온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 47권, 예문지藝文志6 우리나라 시詩1 기자조선箕子朝鮮​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고려高麗

 

[기자조선箕子朝鮮​]

○ 공후인 『고금주古今注 에 이르기를, "공후인은 조선의 진졸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지은 것이다."하였다. ○ 악지에 상세히 나온다. [여옥] 

 

公無渡河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님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그 님을 어이할꼬.
『고시기』

해동역사海東繹史​ 제 70권, 인물고人物考4 후비后妃 명원名媛 중관中官

[명원名媛​]
여옥 여용
○ 공후인은 조선의 진졸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지은 것이다. 여옥이 그 소리를 인근에 사는 여용에게 전하였다.
『고금주』
○ 여옥에 관한 일은 악지에 상세히 나온다.


공후인의 국적, 형성시기와 작자는?

먼저 '공후인(공무도하가)'의 국적에 관한 논의는 중국이다 우리나라다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여러 정황과 상황을 볼때, 위 한치윤의 『해동역사』의 기록에서와 같이 우리나라의 시가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 '공무도하' 시가의 국적문제는 기록 중에 나타난 '조선진'의 위치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는 더이상 거론치 말자. 형성시기 또한 '공후인' 또는 '공무도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남아있는 '고금주'와 '금조'의 제작연대로 추정하여 보면 현재의 학계 통설과 같이 '고조선' 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작자 부분에 있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공무도하가'의 작자에 관하여 먼저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부인 여옥, 그리고 백수광부의 처 등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문헌들에서 주로 인용한 최표의 『고금주』 기록과 그 내용, 그리고 『금조』의 기록을 오역한 것에서 기인된 혼란이 아닐까 생각된다. 『금조』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蔡邕 琴操​』 
箜篌引 者 朝鮮津卒 霍里子高所作也 子高 晨刺船而濯 有一狂夫 被髮提壺 涉河而渡 其妻追止之 不及 墮河而死 乃號天歔欷 鼓箜篌而歌曰 公無渡河 公竟渡河 公墮河死 當奈公何 曲終 自投河而死 子高聞而悲之 乃援琴而鼓之 作箜篌引 以象其聲 所謂公無渡河曲也
琴操​』 箜篌引​ 

"공후인은 조선진졸 곽리자고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배를 살피며 청소하는데 한 미친 사내가 있어 머리를 산발하고 술병을 끌며 물을 건너고 그 처가 따르며 그치려 하였으나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이윽고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처가] 하늘에 울부짖으며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불렀는데,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 그 님을 어이할꼬. 곡을 마치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들으니 그 노래가 매우 슬퍼 이에 거문고로 그 노래를 타며 공후인을 지었는데, 그 소리를 모방한 것이 소위 '공무도하곡'이다."

이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백수광부의 처가 부른 현재 '공후인'이나 '공무도하가'라 불리는 시가詩歌는 제목이 있지 않다. 따라서 곽리자고가 백수광부의 처가 불렀던 노래를 거문고를 타며 부르며 지었다는 '공후인'은 그 내용이 같고 그 곡의 제를 '공후인'으로 지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다음 내용을 보면 곽리자고가 '공후인'을 지었고 그 소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 소위 '공무도하곡'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공무도하가'라고도 부르고 있는 명칭은 '공후인'이 되어야 하고, '공무도하가 혹은 공무도하곡'은 그 원형은 알 수 없으나 '공후인'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곡이라 생각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형식적이고 분석적 내용들이 뭐 그리 중요한가? 이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던 그냥 설화일 뿐이던 우리 고조선기 애절한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이러했음을 알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은 아닐까? 남편을 좆으며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라 절규하며 외치던 백수광부 처의 애달픈 외침이 가슴에 사무친다.

"님하! 물을 건너지 마오."

by Paul LEE


ⓒ 모암문고 茅岩文庫 The Moam Collection www.moamcollection.org
무단전재 및 도용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